국내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벌어진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4부작이 끝났다. 이 다큐멘터리는 예수 실존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여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사면서 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교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선교와 정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온 종교의 인류사적 영향을 살피고 궁극적으로 종교간 영향력을 인정하고 종교간 소통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마무리 지었다.
특히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견지하면서 국내 보수 개신교회가 집단화, 정치화 되는 현상에 우려를 제기하면서 각 종교가 결국 신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함으로서 소통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종교는 개인의 체험과 영성에 기초해야
솔직히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비교 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종교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편집해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좀 충격적인 이유는 국내 개신교도들이 이러한 견해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나 대응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신학적 지식 보다는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 교육을 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 개신교회에서도 앎의 지식 보다는 영성을 중요시 한다. 목사님들이 신학적 지식을 몰라서 그런것은 아니다.
일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3년의 신학대학원 과정을 이수해야 하고 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경우 7년 동안 신학을 배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에 대한 성서 고등 비평이나 비교 종교학 같은 과목을 수강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목사님들은 교회에서는 일반 신도들에게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학(神學)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 기반이 인간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앙을 역사적 배경과 지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다른 종교가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자 한다면 그 신앙이 지식 이상이 될 수 있을까? 마치 ‘사랑’에 빠질때도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사랑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선택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종교적 신앙이라는 것은 ‘개인적 체험을 통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을 가지고 조용히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적 가치가 높은 종교
개인의 가치관을 변화 시킴으로서 종교적 가치관이 얼마나 잘 실천되어 왔는가로 판단을 해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 보다 사회적 가치가 높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는 자기 희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전쟁 같은 해악이 적지 않았지만, 이것은 종교의 정치적인 부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각 개인의 신앙적 가치관들이 물방울이 되어 인류사를 이끌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개인의 가치관이 자유와 평등을 기반한 민주주의, 청부를 기초로한 자본주의 등 기독교적 가치관이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SBS 프로그램은 종교를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악의 세력이니 사탄이니 하는 종교적 언어를 현실에 가져옴으로서 종교적 반목만 키우는 꼴이 될 수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마치 ‘죄’에 초점을 맞춘 종교적 언어를 사람을 향하고 있는 듯 말하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종교인으로서 악의 세력이라는 것은 무차별 테러, 독재를 통한 기아, 대량 살상 무기를 일으키는 영적 세력을 가르키는 것이지 결코 그것을 자행하는 사람에게 향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부시, 김정일, 빈 라덴은 비난 받아야 한다.)
대다수 기독교인은 이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그들과 공존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맹목적 종교적 집단주의이며 이는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다. 기독교는 묵묵히 자기를 희생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SBS의 프로그램가 시의적절했던것은 인정하지만, 메시지의 배경이 된 종교간 화합의 논리는 개인의 종교적 체험의 가치를 부정하는 독이 될수도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려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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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좀 늦었습니다.공각기동대의 주제가로 유명한 러시아 가수 오리가(Origa)가 지난 1월 17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44세.공식 홈페이지에는 부고문이 올라와 있군요. http://origamusic.com/information/저에게는 2007년의 칸노 요코 콘서트에서 본 게 처음이고 마지막인 만남이 되었습니다. 서글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의 오카자키 리츠코 씨도 그렇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왜 이리 일찍 떠나는지… ㅠ.ㅠ 그 콘서트에서 그녀가 ‘오레가 오리가’하면서 일본어 만담 하던 걸 못 맞춰준 게 후회되네요.그녀가 부른 러시아 군가 ‘초원’이 그녀의 추도곡으로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명복을 빕니다.
마음에 안 드셨나 보군요.
그러게요;;
나쁜 놈은 그냥 그 인간이 나쁜 놈이고, 기독교는 원래 좋은거다 라고 하면 말이 안 통하는 거죠.
일반 신자를 비판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력을 강조한듯이 보였는데 기독교적 체험을 방해할수 잇다니 이거참, 기독교만 종굑가 아니니 서로 포용하라잖아요? 난독증이신듯
저 또한 신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몇마디 거들자면..
기독교 교리는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한국교회에서는 이해보다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에 기초하여 이해할 때, 어려움없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니님이 말씀하신바와 같이 영성이 아닌 지식, 즉 믿음이 아닌 이해로써 기독교 신앙을 바라보아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하게될 경우 개인의 기독교적 체험은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유일한 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신 외의 다른 신에 대해 포용하라는 것은 구체적인 지식이 없는 기독교인에게는 굉장한 혼란입니다.
빛과수금님을 비롯하여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이 항상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데 왜 기독교는 배척하느냐고..
그게 어렵습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에서는…
그러한 믿음에 의한 이해가 진정한 기독교, 그 종교로써 믿음이라면 어쩔 수 없다하지만 왠지 대다수의 비기독교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몇몇 집권층(큰 교회를 거느린 목사 등)을 위한 안전밸트와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상공에서 추락하면 빨간 십자가에 찔려 죽을 확률이 가능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비단 저의 생각 뿐일까요?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 같은 목사들을 보면서 기업처럼 커가기만 한 교회의 모습에 흡사 ‘바벨탑’처럼 보이는군요.
모든 것에는 여러가지 면이 있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안전벨트 같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믿음)은 실제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의 기독이라는 것은 Christ, 우리가 흔히 아는 그리스도를 한자로 표현하여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다른 것은 그저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장로인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고, 가톨릭의 부패를 고발하며 교회의 본질을 말했던 루터와 칼뱅이 말했던 것도 “오직 믿음으로” 입니다.
또한 교회는 언제나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으로 (초대교회 장로를 비롯한) 그 제자들에게 몇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과 서로 사랑하라”, “땅 끝까지 구원을 얻는 좋은 소식을 전하라” 이렇게 세가지 입니다.
왜 자꾸 싫은데 전도하냐고 하시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하면 혼자서만 선물(구원)받고 살겠다는 이기적인(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오해는 풀어야겠습니다.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나 초대교회의 장로들같은 사람들이라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믿으면 좋다고 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화도 안내고, 죄도 모르는 순수한 천사가 아닙니다. 그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너무 말이 길어졌지만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신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변질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변할 수 없습니다.
믿으시는 분 같으니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한국에서는 많이 강조가 되는 것 같은데,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된 것인지가 반드시 같이 언급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죄로부터의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게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서 그것을 지키는 일이 목숨만큼 중요해져 버렸죠. 예수가 왔을 때 유대인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운 이유도 그 부분에 있던 것이고.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에서의 해방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합의 길이 드디어 열린것을 두고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죠. 즉, 죄로부터의 구원은 (칭의: 의롭다 칭함을 받음) 나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자가 어때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은혜로 거듭남을 받았으니, 그것에 마땅히 따르는 행위가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 역시 어떤 마음이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서라는 대목도 필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저같이 부패한 인간때문에 기독교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향적으로 무신론자로 분류할만한 개인적 입장에선 아주 재미있었고, 어떤 역사적 사실 중심으로 봐서는 유익했습니다. 제생각과 달리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경전안에 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할 것이라고 전 상상합니다.
윗님 생각과 비슷한데요..전 저 자신도 신의 일부라 생각합니다.
HOok님과 또롱님 처럼 인간이 신의 일부라거나 노력에 의해 신이될수 있다는 견해는 유신론적 견해라기 보다는 무신론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실 신이 있다 없다의 이원론적 관점 보다는 인간이 신에 대해 어떤 의지를 갖느냐에 종교적 가치관이 나눠진다고 생각 합니다. 개신교에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교파가 나누어질 정도니까요.
따라서 모든 종교는 신의 길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길이라고 봐야 하겠죠.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출발점이 다르잖아요. 다른 종교는 사람들이 무언가 해야 하는 노력을 강조하지만 기독교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니까..그렇기 때문에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걸 아니라고 부정을 한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니까..
교리가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겠지요. 사회와 세상의 본이되는 삶을 사는가..
참..저도 참 안타깝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미움과 불신, 분로를 선하게 가장해서 말하는 거 같아 답답합니다. 진정 미워하면서 좋은 명분을 끌여다 쓰는…
진정 방송이 화합을 위한 것이었는지..진정 화합은 기독교가 기독교 다울 때(저 뿌리 밖힌 생각을 날려 버리는 기독교의 힘) 이뤄질 텐데 말이죠..평화라는 것이 비겁한 침묵도 아닌, 긴장과 차이를 받아 들이는 새로움의 창조인데..
종교적 신앙이라는 것은 ‘개인적 체험을 통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개인의 체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에 대한 비판 의식도 공존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목사님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는 부분들이 다양성을 지향하는 세상에서 더욱 필요하리라 봅니다.
7대째 유일신을 믿고 있는 집안이지만 “자유와 평등을 기반한 민주주의” 가 기독교적 가치관이라니… ㅉㅉㅉ democracy 단어 자체가 어디서 나오는데…
뭘 모르면 떠들지를 말던가.
이 무지한 인간들아!!! 신이 어디에 있니? 아부지 아부지 매일처럼 떠들어 봐라. 예수가 지하에서 웃는다. ^^
근대 민주주의의 인권, 자유와 책임, 평등 등 대표적인 가치관이 종교개혁을 통한 개신교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channy 님의 생각에는 동의하기가 어렵군요. 오히려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텐데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와 계몽주의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더 가깝지 않는지요.
참정권의 확대는 신규 노동계층의 탄생과 그들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의식향상과 이에대한 주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인권의 신장이 ‘종교때문이다’ 라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표면적으로 마틴루터킹 말콤X 같은 사람들이 앞에 나서긴 했지만 이들은 종교가 애초에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일 뿐이지 그들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기존 사회가 인정해주는 권위였기 떄문에 그들만이 앞에 나설 수 있었을 뿐입니다. 교리적으로 보자면 성경에는 장애인,거지 들은 신성한 종교의 공간에 들어올 수 없으며, 여자또한 한번에 신을 보면 안되기 때문에 여전히 천주교에서는 면사포를 쓰는 것입니다. 결국 평등, 인권과 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Channy님//
근대 민주주의가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았다니.. ㅎㅎ
재밌군요. 그렇게 한쪽에서만 바라보니까 기독교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거죠. 당시에는 개혁이 대세였죠.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넘어가고, 국가가 강해지면서 종교가 국가 아래로 들어가는 등 변화의 시기였구요. 그런 와중에 (특정)정치세력과 (특정)종교세력이 손을 잡았던거죠.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나 같은 종교인데, 그 이후의 종교만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웃기고, 종교개혁이 서구 민주주의를 이끌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면, 꼴보수 (사이비) 대형 교회가 2메가 정보를 이끌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겠네요 ㅋㅋ
제가 그 두 사이의 관계를 말한 것은 인권, 평등 등의 대한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의 의견은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소수 의견에 해당할 수 있고 실제로 현대 유럽이나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종교 개혁 후 기독교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김홍섭 교수의 기고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44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빨리 망상에서 벗어나길…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고 임종까지 맞는 것 처럼 불행한 일이 있을까?
신비주의자였던 내 아버지. 수 많은 목사들, 수사들, 수녀들의 추종을 받았지만, 성령은 사막위의 신기루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죽어보면 안다…살아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모든 종교의 믿음의 핵심은 신이 있다 없다. 이것 뿐이다..살아 있는 상태로는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존재의 여부를 증명할수는 없다..내가 옳다 아무리 떠들어 봐야 결국 신의 존재여부는 극히 개인적이고 증명할수도 없으며 죽으면 알수있는 개인적 체험일 뿐이다..현대 종교의 태생은 갈등,대립,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이난다..종교에서 평화는 없다..성경이나 코란 불교경전을 봐도 평화는 없다..말만 평화지 내용은 평화가 없다..
역시 사람을 판단하게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소속인가 봅니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유럽이라면 모를까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자니 도무지 공감이 되질 않네요.
기독교가 나쁜 종교는 아닙니다.분명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 해로움보다는 이로움을 더 많이 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는 안하무인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지요. 그리고 교회에 있을때만 정직해지는 사람들도 문제구요. 많이 변질된 부분이 있고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나 그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게 우리나라 기독교의 문제 아닐까요?
SBS의 ‘신의 길 인간의 길’이 드디어 4편을 마지막으로 말 많았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당초 한기총의 방영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영을 강행한 SBS와 한기총과의 갈등은 4편이 한기총의 반론보도와 함께 방영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는 듯 보인다.3,4편이 이틀 간격으로 연속방영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글로 함께 다뤄보려 한다. ‘신의길, 인간의길’ 3편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 3편에서 먼저 살펴볼 수 있는 주제는 인간이 가진 종교성의 의미라는 것이다. 남태..
문제는 믿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과 같은 배타적인
사고입니다…사찰이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도 마찬가지이구요.
아래는 어느까페에 제가 끄적거린 글입니다.
한번 보셔도 해될껀 없겠다 싶네요…
http://cafe.naver.com/inmacbook/75025
배타적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라는 것도 어찌보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를 일이죠. 사고가 자신이랑 맞지 않는다면 그냥 무시해버리시는 것도… ㅎㅎ
게스트님//
배타적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라는 것도 어찌보면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니.. ㅋㅋ 무슨 소린지.. 그럼 그것도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고정관념이라는 건가요? ㅎㅎ 그게 입 다물라는 소리랑 머가 다른지 ㅋㅋㅋ
확실히 ‘신앞에서의 평등’이란 개념은 단일 종교가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사회에서는 아주 이해하기 쉽고, 실천하는 데에도 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보니, 이러한 관념이 민주주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록 성경에 나오는 직분 대부분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중세 유럽에서도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이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더 큰 개념에서 평등이란 관념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로마 철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그것에서 평등과 민주주의의 개념을 찾아낸 이상 종교를 포함한 모든 것을 초월한 만인의 평등으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어떻게 보면 서구 민주주의의 토양이 기독교에 있었고, 서구사회가 이를 바탕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충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다만, 종교가 다르고 피부가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단점이 뚜렷하다는 것도 기억해야겠죠…
<하지만, 목사님들은 교회에서는 일반 신도들에게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학(神學)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 기반이 인간의 기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부에서 말하듯이 미국선교사들이 한국교회사람을 키울 때 같은 말씀이네요. 지식이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영적체험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무지몽매한 상태로 그냥 목사들이 말하는 것만 듣고 멍청히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거군요.
일단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웹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Channy’s 블로그를 나름 구독하는 사람입니다. 종교문제라.. 언급하면 서로 껄끄러워 하는 문제이지만 서로의 생각이 공유되어야 하는 웹2.0의 세상에 맞게 제 생각을 좀 말해보고자 합니다.
일단 자신의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체험을 강조하면서 사회성을 말하는 부분이 어폐가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사회적 영향력이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Channy님도 자랑스럽게 글의 후반부에 언급하였죠. 그러나 그러한 종교가 체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체험은 이성보단 감성에 가깝습니다. 결국 체험의 강조는 감성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됩니다. 이때 이 감성이란 것은 극히 불안정 하여서 상황에 따라서 극심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마치 ‘지킬박사화 하이드씨’ 처럼 어느때는 기독교적 표현으로 천사같던 집단이 악마 같은 행동을 동시에 자행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동종집단과 감정적으로도 매우 불쌍해 보이는 집단들에 대한 이타적인 행동과 타 종교적 집단 혹은 그와 연결된 집단과 개인에 대한 배척과 이기적인 행동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체험의 강조는 사회적인 불편함과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지양해야 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의 역사상 이루어진 모든 ‘인종청소’라는 명목 하에 일어난 일들은 사실상 모두 종교학살 이었다는 사실을, “물론 인류사적으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전쟁 같은 해악이 적지 않았지만” 라고 넘어가는 것은 극히 현대에 까지 자행되고 있는 종교적인 피해에 대해서 “별일 아니야” 라며 종교와 아무런 관계없다는 듯이 슬쩍 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 학살을 일으킨 모든 종교는 개신교와 베이스가 같은 크리스트, 이슬람 교랍니다. 체험의 강조 + 교리상의 외부세계에 대한 배타가 이루어진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현대의 성숙한 사회의 태동에 영향을 끼친 것은 종교라기 보다는 ‘자본의 육성과’ ‘민권의식의 향상’에 기원을 한 것이며, 이는 종교가 없었어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죠. 단지 서구사회에서 이것이 이루어지었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쉽게 심어주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태동한 영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나타난 것이죠. 이 종교적 사상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열심히 일하면 천국 간다’ 인데 사실 근본 기독교적 사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죠(부자가 천국은 낙타 바늘…. 뭔말인지 아시죠?) 자본주의가 널리 퍼지기 위해서 종교라는 허울을 썼을 뿐입니다. 뭐 사실 사회 전체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이게 또 뭐 꼭 좋은 관점이다 라고 하기도 뭐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선후관계가 자본주의가 태동했는데 종교를 활용했을 뿐이지 종교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생하고 자본주의가 발생한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시대의 민주주의적 사상… 종교없이 충분히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죠.
사회의 발전은 이성의 진보와 생산체제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저는 맑스의 이론은 극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자본론적인 관점) 그가 분석한 과거의 사회의 변화양상은 매우 탁월한 분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종교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차라리 “종교는 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니깐 여기에 간섭하지 마시오! 우리도 외부에 피해를 끼치지 않겠소!” 라고 선언하고 체험을 강조하고 그들끼리만 분리 독립해서 산다면, 뭐 할 말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이죠. 때문에 Channy님처럼 주장해선 안됩니다. 극히 정상적인 포용을 이야기한 SBS의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해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종교에 깊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샘 치고서 리처드도긴스의 ‘만들어진 신’을 일독하시기를 권하고 싶군요…
건전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글로써 저의 글을 받아들여 주시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좋은 지적들이고 그 관점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바대로 저도 대체로 인정합니다.
한가지씩 살펴 보면, 제가 강조한 체험은 감성적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종교적 체험에 의해 지배하는 세계관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사형수가 잘못을 뉘우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하는 기독교인의 가치관은 체험을 통한 이성의 변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체험을 통해 기복적인 신앙을 갖거나 극도의 배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실질적 체험으로 오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성경에도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적 영향이 인류사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엄청난 전쟁과 믿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들이 나타나죠. 하지만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는 그와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즉, 체험의 강조-> 올바른 종교적 세계관 -> 긍정적 사회 변화라는 선순환 고리가 잘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성숙성의 원인으로 들어주신 자본의 육성 및 민권의식의 향상 또한 기독교의 청부론과 평등, 인류애적인 구원 같은 종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죠. 그들이 그런 종교적 세계관이 없더라도 현대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은 가능성일 뿐이지 결과는 아니지요. 앞서 말한대로 고대 민주주의가 현대적 민주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았느냐 아니냐의 차이 아닐까요?
역사적으로도 이성의 고양으로 종교가 사라지기 어려운 만큼 종교의 배타성을 인정하면서도 바르게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도록 조언을 주는 것은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의 영성은 어떻게 이야기되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의 성령의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을 체험한 사람들이 마치 그것이 믿음의 기준인양 비신자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미성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가 함께 하시는 동안엔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실수들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들이 믿지 않았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어떻게보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자연스레 강조되는 것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개인적 영성 혹은 체험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러한 영의 도움없이 인간 스스로가 새롭게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흔히 우리가 사회에서 그 사람 개과천선했네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그 사람 본인의 깨달음에(과거 자신의 죄의 반성 등) 기인한 것이라면, 타인의 눈에 놀랄만큼의 변화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어떻게보면, 내 마음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라기보단, 죽어있던 영의 눈이 뜨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 중에서 나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가 없다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에게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아니지만.
영국의 어느 불교신자가 된 사람 인터뷰 처럼 종교를 삶의 도구로 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시각이 비판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달라이 라마가 불교가 마음사용에 대한 기술이라고,일종의 심리학이라고 말한것 처럼요.
신학을 일반 교인에게 안 알려준다는 식의 개념이 전 너무 싫군요. 고등비평까지 안가더라도. 루터의 개혁운동 이전에 라틴어로 된 성경으로 권력을 차지한 카톡릭이 생각나는 군요.
배화교의 영향을 받거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런 부분이 내부적으로 많은 논의가 되고 뭐 그래야 내부적으로 건강해지고 뭐 그런거 아닐까 싶습니다.
그 내부에 신자가 없다면,누구를 위한 교회인지 물어보고 싶군요. 😐
그런 면에서 이 프로는 매우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
다음 커뮤니케이션에 계시는 에반젤리스트 (로 알고 있다) 윤석찬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SBS 에서 얼마전에 방영한 종교 다큐멘터리 4부작에 대한 생각을 올리셨다. Channy’s Blog – 기독교인이 본 ‘신의 길 인간의 길’ 차분한 태도로 여러 면을 살피면서 쓰신 좋은 글이지만, 글에서 엿보이는 좋은 태도와는 별개로 기본적인 시각 자체는 우리가 그동안 흔히 접할 수 있는 주류 개신교인의 그것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도입부의 T..
종교는 개인의 체험과 영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논리는 솔직히 그럴듯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개인의 영적 체험만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는것이 문제죠. 기독교와 접촉이 전혀 없었던 가운데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 영적체험을 얻는것도 아니고 결국 누군가의 도움내지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그러한 영성이라는것을 얻게 될텐데 그것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한정시키는것 적절한 논리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어느 교단의 어느 교회의 어느 목사나 신도들의 영향하에서 놓일수밖에 없는것은 당연할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개인만의 영성으로 한정할수가 있습니까? 솔직히 그 논리는외부로부터의 비판을 방어하고자 하는 의도일수도 있고 설령 그러한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고 해석할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대속하신 것의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성찰없이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갖는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은 종교에 대한 인간의 관점의 다양성을 보여줬을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무엇인지를 모르기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무가치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지 않는 곳은 신성함을 가장한 가장 저급한 인간의 죄악상일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양적 팽창하는 기독교가 질적으로는 가장 저급한 인간의 죄상을 표상할 수 있는 것임을 믿는 자들이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자정능력이 상당히 후퇴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예수는 오셔서부터 가실때까지, 모든 형태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계명은 온데간데 없고, 복주시는 하나님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을 믿고 예수의 삶을 따라 같이 죽는데 (희생하여 남을 살림) 있지, 나부터 잘 살자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부분이 조명이 되기를 바랬지만, 예수는 허구냐 아니냐의 문제를 다루는 바람에 참.. 씁쓸했습니다.
1편 부터 다시보세요
제가 의문인거 공자와 석가모니와 예수중에
왜 예수만 신이 됬는지 신격화 됬겠죠
그런점에선 일말의 의심도 안가는가 보네요
이땅에 들어온지 1세기 정도 밖에 안되는
변방의 종교가 어찌 전세계의 진리인양
영성과 체험 ㅡㅡ;
그런 영성과 체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영성 체험, 그건 종교인아니더라도
수 많은 사람들이 겪습니다
종교인이 아니면 귀신놀음이고 종교인이면
하느님의계시라고 하죠
기독교에서 교리로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만, 예수가 인간이었는가 신이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사실은 대체로 신앙고백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예수는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했기 보다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보내신자로서의 순종을 보이셨죠. 단 그 부분,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 예수는 내 말 안에 거하면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죠. 그것도 못믿겠으면, 내가 한 일 (기적)이라도 믿으라고 하셨죠. 예수는 한 번도 영성과 체험 자체를 강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의 위대함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고 작은 나라에서도 낮고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온 민족에게 알린 것이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영적인 체험을 두고 사람들이 어떤 것은 마귀의 짓이고 어떤 것은 신의 일이고 하는데, 특별한 기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귀가 하는 짓은 해치고 파괴하고 도둑질하는 짓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channy님의 글 잘읽었습니다.
이 시대에서 이슈가 되는 것은 아마도 기독교를 비판하는 영상이나 매체인것 같습니다.
다빈치코드라던지 악마와 천사같은 책들도 많은 인기를 끌고있죠 그래서 sbs에서도 시청률 높여보려고 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저는 역사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잘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알수가 있죠
구약에서 오실 메시야(예수님)를 서술하고 있죠
신약에서는 오신 메시야(예수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씌어진 시기와 저자가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구약에 서술된 예언들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십니다. 그리고 다시오신다고 하셨구요
그럼 정말로 오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지금의 성경이 제대로 담고 있느냐.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것이 과연 옳은것이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프로그램이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과학적 객관성의 입장에선 예수가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것은 당연한 문제라고 봅니다.
다만 신자의 입장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그리스도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믿으면 되고 자기 교회안에서 목사님이든 교인이든 스스로이든 자기가 얻었던 바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비신자의 입장에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라는것을 확인할수 좋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이 신자들과 비신자들의 시각을 고려해서 균형점을 적절하게 잘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류시각이냐 주류가 아닌 시각이냐 입증된것이냐 입증된것이 아니냐의 논쟁을 끌어들이는것은 프로의 본래의 취지에서는 오히려 멀리해야할 관점들입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일런지 모르겠지만 공중파는 그런 논쟁을 끌어들이기 보다는 그것이 소수든 다수든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시각들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데에 무게를 두는것이 당연합니다.
그점에서는 물론 저도 동의 합니다. 균형을 잘 잡았다고 보구요. 하지만, 종교의 역사적 유사성을 들어 종교의 배타성을 무시하고 화합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조금 오버라고 보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입장에서 분명한 이견이 있을테고 비크리스챤 입장에서도 교리를 바탕으로한 이견제시는 얼마든지 존중할수 있습니다. channy님의 주장은 그래도 제 생각에는 비교적 건강한 주장이자 비판입니다.
저는 그 프로가 제기한 의문들이 전적으로 옳으냐 옳지 않느냐를 가지고 논의가 전개되는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정도와 범위의 차이는 있어도 일정정도의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배타성도 사회적 상식이 용인해줄수 있는 수준이 있고 그럴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상대방의 생각에 대한 존중. 공존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옳지 않다라고 생각하더라도 대놓고 너의 생각은 틀렸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판단의 여지를 상대방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내가 찾아가 그를 억지로 끌고오는것이 아니라 알아서 호기심을 갖고 찾아오게 만드는것. 사회가 용인하는 일반적인 도덕규범과 법규범을 따르는것.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적절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하는것. 그러나 남들도 그것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는것. 저는 이러한 수준을 넘어서는 배타성이라면 공동체적 가치관적인 측면에서 인정하기 힘든 배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SBS프로그램의 결론 자체가 기독교를 배격합니다.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노력”을 근거로 하는지 몰라도, 기독교는 “신의 노력”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완전히 다르죠.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석찬님께서는 이런 단도직입적인 말씀을 잘 못하시겠지요. 이해하고 격려합니다.
양태규님이 쓰신 말씀을 토대로 보자면 신의노력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근거로 하는 타종교가 훨씬 긍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제 생각에 양태규님은 시작점을 신과 인간으로 놓고 보시는것 같은데, 시작/근원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보셔야 할듯합니다. 물론 저도 할 생각이고요.
기독교가 처음 발생하였을 때의 의지는 그 동네에서 필요했을지 모르나 세계로 뻗친 영향은 메이저 사이비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가치관을 변화 시킴으로서 종교적 가치관이 얼마나 잘 실천되어 왔는가로 판단을 해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 보다 사회적 가치가 높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는 자기 희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이 부분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신걸 보여주는 대목인듯. “판단”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주관적이듯 보입니다.
다른 종교보다 사회적 가치가 높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예는 많습니다.
당장 한국사회를 보세요. 넘쳐납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 어딘가 항상 허전한 느낌이란게 있죠. 물론, 그 반대도 허전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으로 많이 힘들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 종교의 힘은 정말 큽니다. 하지만, 정작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가졌더라도, 마음 한켠에 쓸쓸하고,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요?
수많은 철학가는 그것을 종교의 필요성이라 역설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의했다고 봅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초인간적 존재를 인정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단순 기독교냐 천주교냐 아니면 그외 다른교냐의 문제라로 결론짓기는 좀 그렇다고 보이네요.
어쨌든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어쨋든 이젠 성경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게 됐군요. 막막한 대응 논리가 영성 체험 신앙입니까? 그렇다면 각자의 영성과 체험을 목사님들이 함부로 판단하고 지도하려면 안되겠죠. 그렇다면 불교의 ‘成佛’과 다른 점은 무었입니까? 현학적 수사와 둘러 말하는 것은 빼고 솔직히 짧게 말하는 버릇을 기릅시다.